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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后殂落事件 / 小早川秀雄 著.

Kobayakawa, Hideo, 187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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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閔后殂落事件 / 小早川秀雄 著.
Author Kobayakawa, Hideo, 1870-1920.
Edition 寫本.
Published [S.l. : s.n., n.d.]
Format 186 張. ; 25 cm.
Language 일본어 (jpn)
설명주기
『민후조락사건(閔后殂落事件)』은 을미사변에 참여했던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1870~1920)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을미사변의 전말을 서술한 회고록이다. 필사본이며 정확한 간행 연도는 알 수 없다. 책의 서언에서 “반도의 천지는 완전히 우리의 소유가 되었다. 기왕을 돌아보고 지금을 보니 충심(衷心)으로 기쁨을 금할 수 없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집필한 것이라 생각된다. 고바야카와 히데오는 일본의 메이지(明治)~다이쇼(大正) 시대의 국가주의자로서, 구마모토현(熊本縣) 출신이다. 조선에서 『한성신보(漢城新報)』 기자로 재직하던 시절 아다치 겐조(安達謙蔵)를 따라 명성황후 살해에 참여하였다. 이후 히로시마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그는 교육계에 투신하여 기쿠치고등소학교장(菊池高等小學校長)이 되었다. 1899년에는 『규슈니치니치신문(九州日日新聞)』 부사장 겸 주필이 되었고 이후 동 신문사의 사장을 지냈다. 이 밖에 구마모토시회 의원, 구마모토현회 의원을 역임하는 등 정치활동에 종사하게 된다. 즉 고바야카와 히데오의 출신지와 이력, 그리고 을미사변 이후의 활동 모두 구마모토와 관련이 되어 있었다. 그는 구마모토 국권당(熊本國權黨) 당원이었으며, 『한성신보』나 『규슈니치니치신문』 활동 이력도 구마모토 국권당과 관련된 것이었다. 구마모토 국권당은 동시기 일본의 여느 정치 세력과 마찬가지로 서구의 위협 속에서 어떻게 일본의 독립을 유지시킬 것인지를 모색하였다. 이들은 서구의 위협 대상으로서 ‘아시아’를 설정하되, 일본이 아시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표상하는 것이 이들의 인식 속 조선의 위상이었다. 이들은 조선에 대해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자 언젠가는 일본에 동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청일전쟁 이전부터 구마모토 국권당은 일본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외팽창 정책을 펼쳐야 하며, 특히 조선에 진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구마모토 국권당은 동시기 다른 정치세력들보다도 더 조선 ‘진출’에 적극성을 띄고 있었다. 이들은 구마모토 지역 청년들에게 한국어를 교습시키고 조선에 도항시키는 것에 대단한 열성을 보였다. 특히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위가 현실화되자 사력을 다해 조선에 진출하고자 하였다. 구마모토 국권당의 기관지 『규슈니치니치신문』 지면에는 노골적으로 일본이 아시아 제국(諸國)을 ‘침략’해야 한다는 논설이 게재되기 시작하였고, 그 ‘침략’의 대상은 아시아에서도 특히 조선을 의미했다. 구마모토 국권당의 조선 ‘진출’ 수단 중 하나가 신문 창간이었다. 『한성신보』의 초대 사장이었던 아다치 겐조 역시 구마모토 국권당원이었으며, 그가 『한성신보』에 인선한 일본인 직원들 역시 구마모토 국권당원이었으며, 한성신보다 건물은 구마모토 낭인들의 숙박시설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아다치 겐조는 한성신보사 사장이 된 후 구마모토 지역 출신자로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를 주필로, 고바야카와 히데오를 편집장으로 삼아 한성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아다치 겐조는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전부터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공사와 접촉하면서 왕비 시해를 결의하였다. 아다치는 가담할 일본 낭인들을 동원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그가 한성신보로 불러들인 구마모토 출신 낭인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사변 당일 한성신보사 앞에서 삿사 마사유키(佐佐正之), 다나카 겐도(田中賢道) 등과 접촉한 그들은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일행과 함께 공덕리로 이동하여 흥선대원군을 대동하고 돌아와 광화문으로 들어가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을미사변의 배경으로서 1895년 당시 한국을 둘러싼 정세의 변화와 일본의 입장, 왕비 살해를 구상하는 과정, 고바야카와 히데오를 비롯한 낭인들의 을미사변 당일 행적, 이후 히로시마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나기까지를 시간 순서에 따라 회고한 것이 이 『민후조락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서언을 포함하여 다음의 총 17장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 서언(緖言) -- 제2장 한국의 최근 정치 역사와 우리 대한(對韓) 정책의 변천 -- 제3장 일본 세력의 실추 -- 제4장 비상수단 -- 제5장 대원군 -- 제6장 미우라 공사의 계획 -- 제7장 공사관 내의 모의 -- 제8장 지사(志士) 공덕리로 향하다 -- 제9장 심야 대원군의 문을 두드리다 -- 제10장 군대 결속하여 경복궁으로 나아가다 -- 제11장 광화문 밖의 충돌 -- 제12장 건청궁 앞의 낭자(狼藉), 민후(閔后)의 조락(殂落) -- 제13장 사변 후 대원군과 한국 조정 -- 제14장 사변 후의 파탄 -- 제15장 미우라 공사 이하의 퇴한(退韓)과 구류 -- 제16장 히로시마 감옥의 수감 -- 제17장 예심 면소(免訴). 고바야카와는 명성황후에 대해 다름과 같이 평가하였다. “민후(=명성황후를 말함)는 한국 근대의 걸출한 인물로 세상에 있을 때 한국 대소의 정치는 대개 민후의 생각에서 나왔으니, 당시의 국왕은 왕비 앞에서는 하나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조락이 한국의 운명에 심대한 관계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즉 당시 고바야카와를 비롯한 한성에 재류하면서 삼국간섭 이후 일본의 세력이 약화되어 가고, 왕비를 비롯하여 한국 조정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정세의 원인을 명성황후에게로 돌리고 있었다. 이에 낭인들은 미우라 공사와 계획하여 대원군을 끌어들이고 궁중에 들어가 건청궁 앞에서 왕비를 살해하였다. 그리고 이후 퇴한 명령을 받고 쫓겨나 히로시마의 감옥에 2개월 정도 구류되었다가 풀려나게 된다. 고바야카와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만큼 사변의 전말을 상세히 알고 있지만, 당시의 일이 비밀리에 계획되고 실행되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진상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안타까워였다. 계획의 중심에 있지 않았던 자가 대충 보고 들은 내용을 엮어서 사건의 실상을 잘못 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회고록에서 그는 일본의 세력이 위협받고 있을 때 자신들이 어떻게 사변을 계획하고 실행했는지를 했는지를 밝힘으로써, 자신을 비롯한 일본인 ‘지사’들이 병합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의 눈으로 본 한국의 근대(개항기~식민지기)와 ‘식민사학’(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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