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Item Details

Back to Results

(明治廿七.八年)在韓苦心錄 / 杉村濬 著.

Sugimura, Fukashi, 1848-1906.

Details

Title (明治廿七.八年)在韓苦心錄 / 杉村濬 著.
Author Sugimura, Fukashi, 1848-1906.
Edition -
Published 東京 : [杉村陽太郎], 昭和7[1932]
Format 204 p. ; 23 cm.
Language 일본어 (jpn)
설명주기
『1894~1895년 재한고심록((明治廿七.八年)在韓苦心錄)』은 한국통으로 알려진 한국 주재 일본공사관의 외교관이었던 스기무카 후카시(杉村濬)가 1894년 5월부터 1895년 10월까지 한국에서 체험하고 관여했던 상황을 기록한 책이다. 1932년 비매품으로 도쿄에서 출판되었으나, 원고 자체는 1904년에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스기무라의 이 기록은 열강의 각축 속에서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노력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가를 보여준다. 필자 스기무라 후카시는 이와테(岩手)현 출신으로 메이지 초기인 1874년 대만 출병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1878년에는 『요코하마마이니치신문(横濱每日新聞)』 기자가 되어, 한국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조선론(朝鮮論)」을 집필한 바 있다. 스기무라는 1883년 5월 인천 부영사가 되어 외교 사안에 관여하게 되었고, 이때 공사관 서기관, 대리공사 등 직책으로 외교 사무를 담당하였다. 1887년에는 귀국하여 1889년 캐나다로 부임하였다가, 1891년 공사관 서기관으로 다시 한국으로 부임하였다. 1893년 7월에는 임시대리공사가 되었고, 1893년 10월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부임할 때까지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이 시기 함경도 방곡령에 따른 배상 요구 등을 처리하였다. 스기무라는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가 깊이 신뢰한 인물이었다. 무쓰의 회고록에서는 스기무라에 대해 “한국에서 수년간 근무한 스기무라는 한국의 정세에 밝을 뿐 아니라 그의 보고서는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높이 평가했다. 한국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무쓰는 은밀히 스기무라에게 “동학당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주목하고, 한국정부가 이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한국 정부와 청국 사신과의 관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주의깊게 관찰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스기무라는 그가 한국에 재임하는 동안 일본의 세력확장을 위하여 많은 일을 기획하고 처리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일본은 청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출병에 대해서 협의하는 한편, 이 기회에 조선에서 일본 세력을 증가시킬 것을 획책하였다. 이에 민씨 세력을 제거하고 친일 정권을 수립시키기 위해 7월 23일 경복궁 점령을 실행하였고, 일본의 간섭을 배경으로 한 갑오개혁에도 관여하였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전권공사로 부임하고 나서는 대원군 및 명성황후의 개입을 억제하면서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가 한국 문제에 관여한 가장 큰 사건은 1895년 을미사변이었다. 1895년 9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공사로 부임하자, 전 공사 이노우에의 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스기무라는 일본인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및 대원군 등과 모의하고 이 기회에 명성황후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일으켰다. 이것이 일본인이 일으킨 소행임이 알려져 스기무라는 미우라, 오카모토 등과 함께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1896년 1월 20일 재판 결과 재판소는 왕비 살해를 기도한 것은 인정하였으나 실제 살해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하며 무죄방면 처분을 내렸다. 석방된 후 스기무라는 대만총독부 사무관, 외무성 통상국장 등 외교사무를 계속해서 맡았으며, 1905년 브라질 주차공사가 되었으나 1906년 브라질 현지에서 사망하였다. 『재한고심록』은 총 3편으로 구성되었다. 전편에서는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가 귀국하자 스기무라가 임시 대리공사로서 업무를 보기 시작했으며,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조선 정부에서는 청에 원병을 파견했고 이에 대응하여 일본에서도 일본군을 파견했다는 내용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에 따라 청·일 양국의 철병 협의가 이루어졌고, 일본이 ‘내정개혁’을 조선에 제의하여 철병을 회피하고 청·일 양국군의 전쟁을 촉발하려는 과정들이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또 7월 23일에는 일본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흥선대원군을 영입하여 신정권을 수립하는 과정과, 개혁추진기구로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고,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가 조직된 것, 박영효가 귀국하고 일본 공사로서 이노우에 공사가 임명되어 오기까지의 과정들을 서술하였다. 후편에서는 이노우에 공사의 부임 후 내정개혁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궁중과 내각이 충돌하는 갈등 과정들이 그려져 있다. 개혁사업은 대원군의 거센 반발을 받았고, 이에 대해 대원군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하는 대신 그의 적손자인 이준용(李埈鎔)을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노우에는 공사로 부임한 직후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은퇴시킴과 동시에,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그 대신에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망명정객 박영효와 서광범(徐光範)을 각각 내부대신과 법부대신으로 입각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을 수립하였다. 삼국간섭(三國干涉) 후 조선 왕실에서는 일본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정책으로 나섰다. 박영효는 삼국간섭 이후 이노우에 공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 일파를 배제하며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해 나갔으며, 박영효의 지나친 독주가 일본과 왕실 양쪽의 불만을 사게 됨으로써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이후 이노우에의 후임으로 미우라 공사가 부임하여 을미사변을 일으키기까지의 과정이 후판의 내용이다. 후편의 추언(追言) 스기무라는 자신이 계획의 중심자로서의 역할은 하게 되었으나 애초에 자신은 거사에서 일본인이 가담했다는 것이 표면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일이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진행되었다고 변명하였다. 이어서 외편(外篇)에서는 을미사변 관련자들에 대한 1896년 1월 히로시마 지방재판소 예심종결 결정서와, 그것에 관한 스기무라의 의견서로 구성되어 있다. 재판소의 결정서에서는 왕비 살해를 기도한 것은 인정하였으나 실제 살해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하며 무죄방면 처분을 내렸다. 이에 대한 의견서에서 스기무라는 설명과 추정이 ‘살해’라는 것에 집중되어서는 안되며, 왕비의 죽음은 부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이 사건을 일으킨 유일한 목적은 궁중에서 러시아당을 얻누르고 일본당의 세력을 회복하는 데에 있었다. 방법으로는 훈련대의 힘에 의지해 대원군을 입궐시켜 왕비를 비롯한 러시아당을 억누르고 내각이 정당하게 정치를 시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살해는 그것에 부수적으로 일어난 일이고 주요한 목적은 아니었다.”그러나 스기무라는 명성황후와 숙적 관계인 대원군을 적극적으로 유인했고, 일본인 및 조선인과의 연락관계를 담당하며 계획·입안의 과정에서부터 참여하고 자문한 자임은 분명하다.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을미사변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직접 참여한 자로서 상세한 기술을 남긴 점에서 사료적 가치는 높다. 그러나 스기무라가 일본의 역할을 정당화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는 부분은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스기무라 후카시의 『재한고심록』은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의 『한성지잔몽(漢城之殘夢)』 및 사쿠라이 군노스케(柵瀨軍之佐)의 『조선시사(朝鮮時事)』와 함께 한 권으로 묶어 출판한 『서울에 남겨둔 꿈』(한상일 역·해설,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3)으로 국역 출판되었다. 일본인들의 눈으로 본 한국의 근대(개항기~식민지기)와 ‘식민사학’(2022)

Items

Barcode Call Number Location Volume 이용현황
10100327227 경 951.054 Su35z Central Library Documentary Heritage 5 이용가능
10900136347 4280 31 Central Library Documentary Heritage 2 이용가능
10900154387 4280 31 Central Library Documentary Heritage 2 이용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