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주명화록』의 내용과 저술 의도 - 『익주명화록(益州名畵錄)』은 북송(北宋)의 문인이자 화가였던 황휴복(黃休復, 10세기 말-11세기 초 활동)이 익주(益州)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관해 기록한 책이다. 『익주명화록』은 상권(上卷), 중권(中卷), 하권(下卷) 총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익주는 오늘날의 사천성(泗川省) 성도(成都)의 중심지에 위치하였으므로 『익주명화록』은 『성도명화기(成都名畵記)』라고도 불렸다. 황휴복은 『익주명화록』에서 당대(唐代, 618-907)부터 북송 초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 년간 익주에서 활동하였던 화가 58명의 생애를 간략하게 기술하고 이들의 작품 세계에 대한 품평(品評)을 남겼다. 익주는 10세기 전반경 후촉(後蜀, 934-965)이 지배하고 있었다.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을 비롯한 여러 도시 출신의 화가들은 후촉과 남당(南唐, 937-975)으로 피신하였다. 이는 후촉과 남당이 혼란스러운 오대(五代) 시기의 여러 왕조 가운데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국가였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남당과 후촉 두 곳에서 궁정의 미술 문화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황휴복의 친우(親友)인 이전(李畋, 10세기 초 활동)이 1006년[경덕(景德) 3년]에 『익주명화록』의 서문(序文)을 썼으므로 이 책은 대략 11세기 초에 저술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전의 서문에 따르면 황휴복은 익주 지역의 그림 중에서도 특히 사찰(寺刹) 벽화(壁畵)들의 훼손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림들을 실견(實見)한 뒤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황휴복은 『익주명화록』에서 각 화가들의 생애를 간략하게 기술하고 그들이 뛰어났던 화제(畵題)를 기록하였다. 일부 화가의 경우 구체적인 작품명이나 작품과 관련된 일화를 수록하였다. 또한 벽화를 기록할 경우 해당 그림이 소장된 사찰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한편 『익주명화록』 중권의 마지막 부분에는 한대부터 당대 사이에 활동한 저명한 재상과 장군의 초상화가 남아 있는 스물두 장소[眞二十二處]에 관한 기록이 있다. 또한 하권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름은 있으나 그림이 남아 있지 않은 화가[有名無畵]”와 “그림은 남아 있으나 화가의 이름이 없는 그림[有畵無名]”이 기록되었다. / 황휴복이 제시한 회화 품평의 기준: 일격, 신격, 묘격, 능격 - 『익주명화록』은 화가들의 생애가 중심이 되어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전기(傳記)의 성격을 띤다. 그런데 이 책은 황휴복이 일격(逸格), 신격(神格), 묘격(妙格), 능격(能格)이라는 네 가지 격(格)을 회화 품평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화가들을 평가하였다는 점에서 회화 품평서(品評書)이기도 하다. 황휴복이 사용한 ‘일격’이라는 회화 품평의 기준은 주경현(朱景玄, 805-835 활동)의 『당조명화록(唐朝名畵錄)』에서 유래하였다. 주경현과 황휴복에 따르면 화가들은 일격, 신격, 묘격, 능격의 네 가지 격으로 구분된다. 주경현은 ‘일상적인 법에 구애받지 않는[不拘常法]’ 창의적인 작품을 일격으로 보았다. 이를 계승하여 황휴복 역시 기존의 회화적 전통으로부터 탈피한 실험적 정신을 가진 화가를 일격으로 평가하였다. 황휴복과 주경현의 책에서 일격으로 분류된 화가들은 공통적으로 그림을 그릴 때 음주(飮酒)를 즐기고 즉흥적이며 과격하지만 간결한 필치를 통하여 거침없이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였다고 묘사되었다. 또한 이들은 세간의 인정을 받고자 지나치게 섬세한 회화 기법을 구사하려 애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황휴복의 저술에는 주경현의 책과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로 주경현과 달리 황휴복은 일격, 신격, 묘격, 능격 중에서 일격을 가장 상위의 기준으로 여겼다. 둘째로 황휴복은 묘격과 능격 안에서 화가들을 다시 상품(上品), 중품(中品), 하품(下品)으로 구분하였다. 셋째로 황휴복은 주경현의 일격 개념에 ‘아무나 본뜰 수 없는 것[莫可楷模]’이라는 독창성(獨創性)의 의미를 추가로 부여하였다. 즉 주경현이 일격이라고 여긴 작품이 일상적인 그림의 법에 얽매이지 않는 개성적인 작품만을 의미한다면 황휴복은 이와 더불어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개별 화가만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황휴복에 따르면 일격의 화가는 거친 필치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였다. 일격의 화가가 그린 그림은 전통에서 벗어난 형태적 질서와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화가의 개성에서 발현된 것이므로 모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익주명화록』에서 황휴복이 일격으로 평가한 화가는 손위(孫位, 9세기 말 활동) 한 명뿐이다. 신격에는 조공우(趙公祐)와 범경(范瓊) 두 명이 있다. 묘격 상품에는 진호(陳皓), 장등(張騰), 조온기(趙溫奇), 조덕제(趙德齊), 노릉가(盧楞伽), 장소경(張素卿) 6명, 묘격 중품에는 신징(辛澄), 이홍도(李洪度), 좌전(左全), 장남본(張南本), 고도흥(高道興), 방종진(房從眞), 조덕현(趙德玄), 상찬(常粲), 상중윤(常重胤), 황전(黃筌) 10명, 묘격 하품에는 이승(李昇), 장현(張玄), 두예구(杜齯龜), 조광윤(刁光胤), 포사훈(蒲師訓), 조충의(趙忠義), 황거보(黃居寶), 황거채(黃居寀), 이문재(李文才), 완지회(阮知誨), 장민(張玟) 11명이 있다. 능격 상품에는 여요(呂嶤), 주행통(周行通), 공숭(孔嵩), 석각(石恪), 두조(杜措), 두홍의(杜弘義), 두자환(杜子環), 두경안(杜敬安), 포연창(蒲延昌), 조재(趙才), 정승변(程承辯), 구문파(丘文播), 완유덕(阮惟德), 양원진(楊元眞) 14명, 능격 중품에는 진약우(陳若愚), 장경사(張景思), 마거례(麻居禮), 승려 초안(楚安), 등창우(滕昌祐) 5명, 능격 하품에는 강도은(姜道隱), 선월대사[禪月大師, 본명 관휴(貫休)], 장순(張詢), 송예(宋藝), 이수의(李壽儀), 승려 영종(令宗), 구문효(丘文曉) 7명이 있다. 황휴복이 일격이라고 평가한 손위는 당나라 말에 활동하였던 동월(東越) 출신의 화가이다. 손위는 당나라 희종(僖宗, 재위 874-921)이 황소(黃巢)의 난(亂)으로 성도로 피난을 가자 그를 따라 성도에 가서 그곳의 사찰들에 다수의 벽화를 남겼다. 손위는 각종 도불교 신이나 송석(松石) 및 묵죽(墨竹)과 같은 주제를 잘 그렸다고 전한다. 가령 그는 응천사(應天寺)에서 무지선사(無智禪師)의 청으로 산과 바위[山石]나 용수(龍水)의 주제를 그림으로 그려주었다. 황휴복은 당시에 손위의 화풍에 영향을 받지 않은 화가가 없었다며 그를 상찬하였다. / 『익주명화록』과 중국의 화원 제도 - 한편 『익주명화록』은 오대부터 송대까지 이어진 화원(畵院) 제도와 북송 화원에서 활동한 화가들 및 그들의 화풍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화원은 황실과 궁정에 필요한 그림들, 즉 황제의 어람용(御覽用) 그림, 황제와 황후의 초상, 공신 초상, 궁궐 및 사관(寺觀) 장식을 위한 벽화 그림 등 황제 개인과 황실, 궁정의 행사 및 의례에 필요한 그림들을 전문적으로 제작하기 위하여 설치된 궁정 기구(機構)이다. 송대는 중국의 화원 제도가 확립된 시기였다. 송대에 이와 같이 화원 제도가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대 시기의 분열된 국가들이 송대에 통일되면서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화가들, 특히 남당과 서촉 지역의 화가들이 송의 궁정에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익주명화록』에는 그중에서도 특히 후촉 지역에서 활동한 화가들에 대한 기록이 잘 남아 있다. 『익주명화록』은 송대의 원체화풍(院體畵風)이 형성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예를 들어 『익주명화록』에는 후촉의 한림도화원(翰林圖畵院)에서 한림대조(翰林待詔)로 활동하였던 황전[黃荃, 자는 요숙(要叔), 903-965]과 그의 아들인 황거보[黃居寶, 자는 사옥(辭玉), 960년경 사망], 황거채[黃居寀, 자는 백란(伯鸞), 933-993년 이후 사망]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품평이 상세하게 남아 있다. 이 가운데 황거채는 북송이 중국을 통일하자 개봉(開封)에 있는 북송의 궁정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 결과 “황씨체(黃氏體)”라고 불리는 황전의 화조화 화풍은 북송의 화원에서 원체화풍이 성립되는데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익주명화록』에는 황씨 부자가 화조화를 그리는 데에 매우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가령 『익주명화록』에서 황전에 관한 조(條)에는 황전의 환영(幻影)적인 화조화에 관한 일화가 전한다. 황전은 광정[廣政, 후촉의 제2대 황제인 후주(後主) 맹창(孟昶, 재위 934-965) 때의 연호(年號)] 신축년(癸丑年)에 새로 축조된 팔괘전(八卦殿)의 벽화로 “사계절의 꽃과 대나무[四時花竹]” 및 “토끼와 꿩, 참새를 포함한 각종 새[兔雉鳥雀]”의 모습을 그리라는 명을 받았다. 그해 겨울에 사냥용 새들을 관리하는 관청인 오방(五坊)의 관원이 팔괘전 앞에서 웅무군(雄武軍)이 바친 하얀색 매를 맹창에게 보였다. 그런데 그때 이 매가 팔괘전의 벽화 속 참새가 살아 있다고 착각하여 참새를 사냥하고자 발톱을 여러 번 세웠다고 전한다. 이를 보고 감탄한 맹창이 당시 한림학사(翰林學士)였던 구양형[歐陽炯, 자는 부상(不詳), 896-971]에게 이를 “벽화기이기(壁畵奇異記)”라는 글로 남기도록 했다고 하였다. 『익주명화록』 제1권 마지막 부분에는 구양형이 썼다는 『기이기』가 실려 있다. 이 외에도 『익주명화록』에는 황전이 <춘산도(春山圖)>, <추산도(秋山圖)>, <산가만경도(山家晚景圖)>, <산가조경도(山家早景圖)>, <산가우경도(山家雨景圖)>, <산가설경도(山家雪景圖)>, <산거시의도(山居詩意圖)>, <소상도(瀟湘圖)> 등과 같은 계절과 시간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경치를 그린 산수화에도 뛰어났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또한 황거채의 조에서도 황거채가 황전과 합작(合作)하여 <사시화작도(四時花雀圖)> 같은 화조화뿐만 아니라 <청성산도(靑城山圖)>, <아미산도(峨眉山圖)>, <춘산도(春山圖)>, <추산도(秋山圖)>와 같은 산수화를 그렸다고 하였다. 아울러 황거채는 <사시야경도(四時野景圖)>, <호탄수석도(湖灘水石圖)>, <춘전방목도(春田放牧圖)> 등을 그리기도 하였는데 당시 후촉의 공경대신들과 호사가들은 황씨 부자의 그림을 얻으면 집에서 보관해야 할 진귀한 보물로 여겼다고 한다. / 당대부터 송대까지 제작된 화사서와 『익주명화록』 - 중국에서 화가를 중심으로 한 회화의 역사[畵史]를 기록한 책은 『익주명화록』이 저술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당 태종 정관(貞觀, 626-649) 연간에 활동한 배효원(裵孝源, 7세기 전반 활동)의 『정관공사화사(貞觀公私畵史)』(639년)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화사서(畵史書)이다. 『정관공사화사』는 진대(晉代, 265-420)부터 당대까지의 293점의 회화와 이를 그린 화가 53명이 기록된 책이다. 또한 현전하지는 않으나 오대 시기에도 익명의 인물들이 남긴 『강남화록(江南畵錄)』이나 『양조화목(梁朝畵目)』 및 서현(徐鉉, 916-991)의 『강남화록습유(江南畵錄拾遺)』, 호교(胡嶠, 10세기경 활동)의 『양조명화목(梁朝名畵目)』과 같은 책들이 저술되었다. 이 책들은 남당과 후량(後梁, 907-923) 등에서 활동한 화가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작품에 관해 논한 책이라 생각된다. 『익주명화록』은 저자와 비교적 가까운 시대에 활동한 화가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전 시기의 화사에 관한 책들과 구별된다. 『익주명화록』에 기록된 화가 58인 가운데 안록산(安祿山)의 난 시기에 당 현종(玄宗, 재위 712-756)을 따라 촉에 입성한 화가 노릉가와 780년경 활동한 신징 두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화가는 800년대 이후에 활동하였다. 따라서 『익주명화록』은 황휴복이 활동하기 전 대략 150년간 활동한 화가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즉 당나라에서 활동한 화가 97인을 다룬 주경현의 『당조명화록』에 비하여 『익주명화록』은 사실상 동시대의 화가들을 다룬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익주명화록』과 같이 저자와 비교적 가까운 시기의 특정 지역에서 활동한 화가들의 생애와 작품이 기록된 화사는 이후에도 제작되었다. 유도순(劉道醇, 11세기 중반 활동)의 『성조명화평(聖朝名畵評)』[혹은 『송조명화평(宋朝名畵評)』, 서문은 1060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유도순은 『성조명화평』에서 북송 초에 활동한 화가 110명을 화목(畵目)에 따라 분류하여 기록하였다. 한편 『익주명화록』은 오대와 북송 초에 활동한 화가들에 대한 이후의 저술에도 주요 참고문헌으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북송의 곽약허(郭若虛, 11세기 후반경 활동)는 『도화견문지(圖畵見聞誌)』에서 당 회창(會昌) 원년(841년)에서부터 송 희녕(熙寧) 7년(1074년)까지의 기간 동안 활동하였던 화가들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이 중 곽약허는 당나라 화가 17명, 오대의 화가 27명에 관한 기록을 『익주명화록』에서 참고하였다. 중국회화와 관련된 문헌의 역사와 중국미술사의 탄생(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