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鄕歌の解讀特に願往生歌に就いて(향가의 해독 특히 <원왕생가>에 취하여)』는 국문학자 양주동(梁柱東, 1903 ~ 1977)이 쓴 단행논문의 별쇄본이다. 이 논문은 『청구학총(靑丘學叢)』 19호(1935년 2월)에 수록되어 있다. 표지의 크기는 23.0×15.0㎝이며, 논문은 총 46쪽 분량이다. 『청구학총』은 1930년 5월경 경성제국대학 소속의 교·강사와 졸업생, 총독부와 조선사편수회 관료들이 모여 조직한 청구학회에서 발간하는 잡지이다. 1930년 8월에 발간한 제1호부터 1939년 10월 제30호에 이르기까지 매년 4호씩 꾸준히 간행되었으며, 다양한 연구성과들을 담아내었다. 이 논문은 양주동이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의 저서 『향가 및 이두의 연구(鄕歌及び吏讀の硏究)』(1929년 간행)를 읽고 자극을 받아 향가 연구를 시작하면서, 연구의 초석을 다지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이후 양주동은 『삼국유사』에 실린 14편과 『균여전』에 실린 11편 등 현존하는 25편의 신라 향가를 해독·주석한 결과를 집대성하여 『조선 고가 연구(朝鮮古歌研究)』(1942)를 발간하게 된다. 이 논문의 저자인 양주동은 1903년 개성에서 출생하여 황해도 장연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5세 전후에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1년후 중퇴, 이후 5, 6년간 독학으로 한학에 몰두하여 상당한 소양을 쌓았다. 1920년 신학문에 뜻을 두고 중동학교 고등속성과에서 1년간에 구제 중학 전 과정을 수료하고 1921년 일본 동경의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학과에 진학한다. 1928년에 졸업한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영문학교수로 부임하며 10년간 재직하였다, 1930년 시집 『조선의 맥박』을 간행하였고, 1937년에 「향가의 해독, 특히 원왕생가에 취하여」를 발표하며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1938년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숭실전문학교가 폐교되었고, 1940년에 경신학교 교원으로 부임하였다. 1942년에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를, 1946년에 『여요전주(麗謠箋注)』 간행하였으며 1947년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1958년부터 4년간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2년에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임하였으며 1973년 정년 퇴임하기까지 후학 양성과 연구에 힘썼으며 1977년 2월에 타계했다. 『향가의 해독 특히 <원왕생가>에 취하여(鄕歌の解讀特に願往生歌に就いて)』는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는 서론에 해당한다. 2장과 3장에서는 오구라 신페이의 연구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 다음, 4장에서는 <원왕생가(願往生歌)>의 해독과 의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펼치고 5장에서 결론을 제시하며 논의를 마무리하고 있다. 각 장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장에서는 오구라 신페이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에 대해 외국어인 조선 고어에 정통하여 향가를 해독한 경이적인 업적이라고 평하면서, 조선어를 모국어로 하는 학자로서 향가에 대해 학문적인 관심을 관심이 생겼음을 밝히고 있다. 오구라 신페이 이후 한 줄의 비평도 제기되지 않는 학계에 대한 감개함을 드러내면서, 오구라 신페이의 해독이 지닌 근본적인 결함과 적지 않은 오류를 지적하고 그 예를 보이려고 한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2장에서는 오구라 신페이의 향가 해독의 문제점으로 시가의 형식을 도외시한다는 점을 꼽고 있다. 먼저 오구라 신페이가 향가를 4구, 8구, 10구로 구분되며, 각 구의 음절 수는 악률에 맞추어서 역문을 정련한 뒤가 아니면 결정할 수 없으나 대략 8·8·8·8, 8·8·8·8, 8·8의 형식을 취하면서 첫 구는 3음절에서 5음절로 비교적 짧다고 분석한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이 분석에는 일견 동의하면서도 실제 해독에서 이를 반영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해독과 형식론이 합치되지 않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어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시가의 운율형식을 생각하지 않았을뿐더러, 그 의미조차 전달하기 어려운 해독이라고 보았다. 이로 보건대 양주동은 향가 해독에서 향가의 운율적 형식에 관심을 둔 향가 해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식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3장에서는 오구라 신페이의 향가 해독의 문제점으로 작품의 의미를 미리 정해 놓고 이에 맞추기 위해 무리한 해석을 시도하는 오류들이 많다고 지적하면서, 구체적인 해독의 예시들을 지적하고 있다. 글자의 용례를 귀납적으로 연구하기보다 필요에 따라서 재료를 찾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부분이 있는 점을 경계하고자 하였다.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의 “塵塵馬洛佛體叱刹亦”(5구)의 ‘馬洛’, “刹刹每如邀里白乎隱”(6구)의 ‘每如’, “此良夫作沙毛叱等耶”(10구)의 ‘夫’, <칭찬여래가(稱讚如來歌)>의 “今日部伊冬衣”(1구)의 ‘部’, “无盡辯才叱海等”(3구)의 ‘海等’, “一念惡中涌出去良”(4구)의 ‘惡中’, <광수공양가(廣修供養歌)>의 “伊於衣波最勝供也”(10구)의 ‘於衣’, <청전법륜가(請轉法輪歌)>의 “彼仍反隱”(1구)의 ‘仍反隱’, “覺月明斤秋察羅波處也”(10구)의 ‘波處’, <총결무진가(總結无盡歌)>의 “衆生叱邊衣于音毛”(3구)의 ‘叱邊衣于音’, 득오(得悟)의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의 “去隱春皆理米”(1구)의 ‘皆’ <헌화가(獻花歌)>의 “紫布岩乎邊希”(1구)의 ‘紫布’, <안민가(安民歌)>의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5구)의 ‘窟理叱’,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의 “沙是八陵隱汀理也中”(4구)의 ‘沙是八陵隱’, <처용가(處容歌)>의 “二肹隱吾下於叱古”(5구)의 ‘吾下’, “二肹隱誰支下焉古”(6구)의 ‘誰支下’, “本矣吾下是如馬於隱”(7구)의 ‘本矣’, <맹아득안가(盲兒得眼歌)>(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로도 불림)의 “膝肹古召旀”(1구)의 ‘古召’, <혜성가(彗星歌)>의 “乾達婆矣遊鳥隱城叱肹良望良古”(2구)의 ‘乾達婆’, ‘遊’, ‘城’ 등의 사례들을 제시하고 예증을 통해 오류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4장에서는 <원왕생가>에 대해 오구라 신페이가 “본 향가는 광덕의 처가 엄장을 간언한 노래로 볼 것이다.”라고 해석한 부분을 두고 『삼국유사』의 본문을 오독한 결과라고 보았다. ‘嘗有歌云’ 4자를 두고 노래는 상단의 이야기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광덕의 아내가 평소에 일찍이 읊은 노래를 그녀의 신앙이 깊음을 방증하기 위하여 덧붙인 노래라고 보았다. 곧 일연이 이 노래의 유래를 설명하고자 긴 이야기를 적은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주(主)고 노래는 단지 광덕 처의 신앙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가벼이 말미에 붙인 것으로 광덕의 처가 평소에 맘속에 푼은 바를 노래에 가탁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에 따르면 <원왕생가>는 광덕의 처가 평소 자기의 신앙을 달에 부쳐 노래한 것이 된다고 보고, 이어서 <원앙생가>의 10구를 나누어서 한 구씩 해독을 제시하고 있다. 해독의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 이뎨 西方□장 가샤리고 / 無量壽佛 前에 닐러[닏]곰다가 □고샤셔 / 誓홈[다딤] 기프샨 尊애 울워[워리] 두손 모도호□□ / 願往生 願往生 그릴 사□ 있다 □고샤셔 / 아으 이몸 기텨 두고 四十八大願 일고샬가.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달아, 이제 서방(西方)까지 가시고 / 무량수불(無量壽佛) 전(前)에 일러 사뢰어 주소서 / 신서(信誓) 깊으신 존(尊)을 우러러 두 손을 므와 / ‘원왕생 원왕생’ 그릴 사람 있다고 사뢰소서 / 아아, 이 몸을 남겨 두고 사십팔대원(四十八大願)을 성취하시면 어이할까. 5장에서는 오구라 신페이의 연구 이후 조선 학자의 연구가 없음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면서, 오구라 신페이의 연구에 힘입은 바 크다는 말로 논의를 마무리하고 있다. 이 논의는 신라 향가 연구의 첫 성과로서 연구사적 의의가 크다. 경성제대 지식인과 한국문학(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