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발달사(京城發達史)』는 1876년 개항 후 한반도로 건너 온 일본인들이 식민도시 경성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난’과 ‘치적’을 기록한 거류민사(居留民史)이다. 이 책은 약 1세기 전 경성의 일본인들이 과연 서울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활하였으며,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루고자 하였는지를 기록한 책이다. 그런 점에서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어가는 과정을 ‘서울’이라는 미시적 공간의 변화를 통해 살필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경성의 일본인들이 거류민사 발간을 처음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확대된 러일전쟁 직후였다. 그러나 그 후 복잡한 국내외 상황으로 인해 발간작업은 잠시 보류되었다. 답보상태에 있던 이 책은 공백기를 거쳐 경성거류민단 조직이 용산거류민단을 흡수통합하며 비로소 체계를 갖추고, 복잡다단한 ‘병합’의 전후 과정이 마무리되는 시점인 1912년에 출간되었다. 서두의 예언(例言)에 따르면 영사관보인 데부치 가쓰지(出淵勝次, 1878~1947)가 찬조금을 내고, 경성의 중진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기쿠지 겐조(菊池謙讓, 1870~1953)가 앞장 서 조선잡지사 사장 샤쿠오 슌조(釋尾春芿, 1875~?)에게 집필을 의뢰했다고 한다. 그러나 1906년도 분까지 집필이 완료된 시점에서 작업이 중단되자 1911년 아오야기 쓰나타로(青柳綱太郎, 1877~1932)가 붓을 이어받아 당시 거류민단장이었던 고조 간도(古城菅堂, 1857~1934)의 후원을 받아 마무리하였다. 책의 주요 내용을 선정하고 기본 틀을 확립한 것은 초대 편찬자인 샤쿠오였다. 그의 성은 ‘도키오’라고도 하는데, 지인들은 흔히 ‘샤쿠오’라고 불렀다. 샤쿠오는 본명 슌조 대신 그의 호 ‘도호(東邦)’를 넣어 ‘旭邦’, ‘東邦生’, ‘東邦山人’ 등의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1900년 내한한 이후 주로 언론활동에 종사했는데, 이 책의 초대 편찬자가 된 계기는 1908년 창간된 월간지 『조선(朝鮮)』에서 편집장을 맡게 된 것이었다. 1909년 샤쿠오는 조선잡지사를 인수하여 사장으로서 경영과 편집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조선』은 1912년부터 『조선급만주(朝鮮及滿洲)』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급만주』는 1941년까지 통권 398호가 발간되었을 만큼 조선의 최장수 잡지로서 대표적인 일본인 시사잡지였다. 아울러 샤쿠오는 조선사정 조사의 일환으로 조선을 연구하기 위한 단체인 조선연구회를 이끌며 고서 수집과 사료 간행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경성발달사』의 후임 편찬자인 아오야기 쓰나타로와는 동년배 저널리스트로 막역한 사이였다. 이 책을 마무리한 아오야기 쓰나타로는 난메이(南冥)이라는 필명을 사용했으며 경성신문사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조선 궁내부에서 조선사 편수를 담당한 연구자였다. 그는 1901년 한국으로 건너왔으며 이후 통감부 관료로 일하다가 촉탁으로 궁내부의 왕실 도서를 정리하게 된 것을 계기로 조선사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1910년 병합을 계기로 지인들과 조선연구회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조선의 고서 간행 및 개인 저술에 전념하였다. 이 책은 504쪽의 활자본으로 총 10편으로 구성되었다. 구성상의 특징은 연대기 형식과 주제별 형식을 혼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1편 서설에서는 1910년 ‘조선병합’은 단순히 영사관·공사관 등 일본 본토에서 파견된 관헌의 치적이 아니라, 거류민들이 조선인의 저항을 몸소 견뎌가며 갖은 고난 끝에 삶의 뿌리를 내린 노력의 결실임을 강조하였다.“돌이켜 보건대 30년 전에는 서쪽 성문 밖 외딴 곳 연지(蓮池)에 반도 개척의 일대 사명을 띤 우리 욱일기가 적막하게 나부끼고 있었다. 피를 부른 사건(임오군란)이 발생한 이래 수많은 조선인들의 위해 행위가 되풀이 되었다. 특히 양대 전쟁(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전후해 빈발했던 소소한 혈투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때마다 우리 거류민들은 다대한 손해와 혈세를 감수하였다. 이제야 일본과 조선이 일가를 이루어 동양에서 화란(禍亂)의 근원을 제거하였다. 이것이 어찌 우리 관헌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 국민들의 정수인 바로 경성 거류민들의 노력과 기세가 자연스레 삭을 틔우고 무르익어 비로소 오늘의 결실을 맺었다.” 거류민들은 본토와 다른 환경과 문화 풍토 속에서 현지인들의 저항을 받으며 항상 위기의식과 함께 본토에 대한 미묘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거류민들은 자신들이 ‘해외 일본인’ 집단으로서 가지는 존재가치를 식민관청이나 일본 중앙정부에 각인시키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식민기구·중앙정부와 일본인 거류민 집단 사이의 미묘한 알력과 갈등 관계가 발생하는데, 『경성발달사』에서는 그 갈등이 1912년 시점에 가시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거류민들의 ‘노고’와 ‘치적’을 반복해 강조하는 것은, 정책을 일방적으로 하달하기 시작한 행정관청에 대해 단결을 도모하고 집단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제2편 거류지 발전 상황은 이 책의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으로 전체 분량의 2/3를 차지한다. 이 부분은 1876년부터 1910년까지 1년 단위로 주요 사건과 영사관·공사관의 동향, 거류민 조직의 변화를 시간 순서대로 정리한 것이다. 이 편에는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동학농민운동, 을미사변, 러일전쟁, 통감부설치, 강제병합 등 한국 근대사 및 일본의 한국 침략사에서 주요한 사건들이 기술되어 있는데, 이 사건들을 거류민의 관점으로 기술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제3편부터 제9편까지는 경제·교육·위생·종교·교통 등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제3편에서는 경제발전상황, 제4편은 경성일본상업회의소 연혁, 제5편은 교육발전 상황, 제6편은 위생발전 상황, 제7편은 종교발전상황, 제8편은 교통발달 상황, 제9편은 용산 발달 소사(小史)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이를 통해 일본인들이 경성에서 세력을 어떻게 확장해 갔는지, 식민도시 경성이 어떻게 구축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제10편의 여록은 경성 거류민 발달사를 각종 통계로 정리하고, 본문에서 다루지 못한 회사, 신문사, 대신궁, 소방조 등의 발전 추이를 정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한병합과 민단’에서는 병합의 결과 거류민단이 행정기구로 편입되어야 하나, 이에 대해 거류민의 자치를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요구하며 끝을 맺고 있다. 아울러 『경성발달사』는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에서 2010년 국역본을 출간하였다. 2022년 해설집 원고[일본인들의 눈으로 본 한국의 근대(개항기~식민지기)와 '식민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