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田渡碑」의 碑題는 Daicing gurun i enduringge han i güng erdemui bei 「大淸皇帝功德碑」이다. 그러나 이 비는 丙子胡亂의 사연을 기록한 國恥의 碑여서 우리는 보통 「三田渡碑」라 부르고 있다. 1632년(天聰六年)에 製定된 有圈點 滿洲字로 기록된 初期 滿洲語 硏究에 有用한 가장 이른 시기의 滿文 碑文이다. 「삼전도비」는 비석 전면 좌측에 만주문(滿洲文), 우측에 몽고문(蒙古文), 후면에 한문(漢文)으로 기록되어 있다. 「三田渡碑」의 내용과 『舊滿洲檔』(새 영인본 『滿文原檔』)과 滿文老檔의 丙子胡亂 前後 수년간의 기록을 보면 丙子胡亂은 특이한 전쟁이었다. 명과의 관계를 차단하려는 것이 전쟁의 주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문의 내용에도 그러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 비석은 그간 갖은 수난을 겪어 왔으나 이 碑石의 滿洲文은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어 있다. 「三田渡碑」의 滿洲文은 中國 第一歷史檔案館 所藏 內國史院檔 崇德四年(1639) 十二月 二十八日 條에 移記되어 殘檔으로 남아 있고(표기법이 좀 다른 곳들도 있음), A Pozdneev(1890)의 石印本(표기법이 원 비문과 다른 곳이 있다. 碑題 中 güng 을 신만주어 gungge 로 고쳤음)이 있으며, 朝鮮金石總攬(1919)에서 사진을 볼 수 있다. 개인 소장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탁본이 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으나 도서관이나 박물관 소장 탁본은 없는 것 같다. (성백인)